지난 달 22일 대한병원협회를 시작으로 한 달여 동안 진행됐던 유형별 수가협상이 대한의사협회를 제외한 모든 의약단체가 공단과 수가계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2조4000억원에 이르는 건강보험 재정 흑자 기소 속에서 공단과 수가계약을 체결한 의약단체는 지난해 수준을 상회하는 인상률을 얻어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수가협상을 "퍼주기식"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공단 재정운영위원회가 공단 협상팀과 의약단체가 체결한 수가계약안에 대한 의결을 유보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17일 수가계약 종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으로 예상됐던 수가협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편집자주]
의협 제외 전 의약단체 수가계약…약사회 2.2% 수가인상
올해 수가협상에서 대한약사회는 지난해 수준을 상회하는 2.2%의 수가인상률을 얻어내며 기존 63.1원이던 환산지수(상대가치점수 당 단가)가 내년에는 64.5원까지 오를 예정이다.
약사회 뿐만 아니라 병협 2.0%, 대한치과의사협회 3.5%, 대한한의사협회 3.6% 등 이번 수가협상에서 의약단체는 전반적으로 지난해에 비해 0.5% 가량 높은 수가인상률에 공단과 계약을 체결했다.
▲ 공단-의약단체가 체결한 2009년도 수가 인상률
반면 의협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공단과 수가 자율계약에 실패하며 유형별 수가협상이 시작된 이후 2년 연속 복지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수가가 결정되는 불운을 겪게 됐다.
공단이 타 의약단체에 지난해에 비해 0.5% 정도 높은 수가인상률을 제시한 것과 달리 의협에게는 지난해 수준인 2.5% 수가인상을 제시하자 의협이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며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협상 가이드라인 "2.4% 인상"…손쉬웠던 수가계약
▲ 약사회 협상팀이 수가협상 시작 전 공단측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올해 수가협상은 의협을 제외한 모든 의약단체에 공단이 지난해에 비해 높은 수가인상률을 제시하며 상대적으로 손쉽게 계약이 체결되는 양상을 보였다.
협상 과정에서 양측이 수가인상폭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양상은 여전했지만 의약단체가 공단이 제시한 인상률에 내심 상당한 만족감을 표시하며 별다른 잡음없이 수가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는 공단의 수가협상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공단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지난해 의약계 전체 평균 수가인상률 1.94%를 크게 상회는 2.4% 인상을 수가협상 마지노선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재정운영위로부터 공단 수가협상 가이드라인 결정을 위임받은 소위원회는 당초 지난 9일 1차 회의에서는 내년 수가인상폭을 2% 이내로 결정했지만 15일 회의에서는 2.4%까지 인상된 가이드라인을 공단 협상팀에 제시한 것이다.
1차 회의에서 "동결을 선언한 후 협상을 진행할 것"을 주문했던 소위원회가 복지부와 공단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2차 회의에서는 지난해 수준을 크게 상회하는 2.4%의 수가인상 가이드라인을 설정한 것이다.
소위원회가 결정한 수가협상 가이드라인은 2조원이 넘는 건보 재정 흑자, 5%에 이르는 물가인상률 등이 동시에 고려된 것이지만 공단 협상팀의 예상조차 뛰어넘는 수가인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논란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의약단체의 수가인상 요구가 높은 상황에서 공단 실무진도 협상의 여지를 위해 내심 2% 초반대의 수가인상 지침 정도는 필요하다고 봤을 것"이라며 "그러나 재정운영위 소위원회는 이를 넘어서는 인상폭을 제시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가입자의 대리인인 공단이 의료공급자의 이익 대변"
그러나 공단 수가협상 지침으로 2.4%의 수가인상을 제시한 소위원회의 결정은 공단 협상팀이 의약단체와의 본격적인 인상폭 조정에서 지난해를 넘어서는 수치를 제시하며 뒤늦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공단이 협상 막판 의약계에 제시하는 수가인상안이 전체적으로 1%대의 평균 인상률을 넘어서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일부 시민·사회단체가 뒤늦게 공단에 소위원회가 제시한 협상 지침을 직접 확인한 것이다.
당초 공단의 수가인상폭 가이드라인을 지난해 수준으로 판단했던 시민·사회단체는 협상 종료 2~3일전 소위원회의 최종 지침을 확인한 후 공단이 의약계에 "퍼주기식" 수가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 건강연대가 재정운영위원들에게 전달한 성명
협상 종료일인 17일 건강세상네트워크를 시작으로 민주노총이 공단이 의약단체에 제시한 수가인상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 했으며 공단 재정운영위에 참여하는 단체가 다수 포진한 건강연대로 뜻을 같이했다.
건강세상과 민노총은 일제히 "공단이 수가계약 성과에 급급해 의약단체에 과도한 수가인상률을 안겨주고 있다"며 "가입자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공급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단 재정운영위, 수가계약 체결안 의결 "거부"
이로 인해 올해 수가협상은 의약단체가 공단이 제시한 수가인상률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수가협상이 격화되던 예년과 달리 시민·사회단체가 공단의 협상 기조를 비판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결국 이러한 비판은 재정운영위 전체 회의로 불똥이 튀면서 17일 수가협상 종료 직후인 18일 공단 협상팀과 의약단체가 체결한 수가계약을 의결하기 위해 열린 회의에서 수가계약안이 의결되지 못하는 불상사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민노총을 비롯한 가입자 단체들은 재정운영위 소위원회가 마련한 2.4% 수가인상의 근거를 제시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이를 명확히 하지 못할 경우 의결을 할 수 없다는 완강한 입장을 고수했다.
때문에 수가협상 종료 직후 재정운영위가 협상 결과를 의결, 이를 발표하고 계약 당사자인 공단 이사장과 의약단체장이 유형별로 수가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절차도 잠정 유보됐다.
자칫 공단과 의약단체가 자율적으로 체결한 수가계약이 재정운영위를 통과하지 못한 채 부결될 경우 복지부 건정심에서 다시 수가결정이 논의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 시민단체가 재정운영위 회의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재정소위가 결정한 수가인상폭 가이드라인이 2.4% 이하였다는 것을 협상 종료 하루 전에 알게 됐다"며 "수가협상 가이드라인의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의결에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재정운영위는 공단이 2.4% 인상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이상 회의 자체가 진전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18일 회의를 종료하고 오는 23일 다시 재정운영위 회의를 소집해 의결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입 다문 경실련·참여연대…재정소위 책임론도 제기
공단과 의약단체 간의 자율 수가계약에 대한 재정운영위 의결이 지연되면서 공단 재정운영위 소위원회의 책임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재정운영위 소위원회가 2.4%라는 수가인상 가이드라인을 공단 협상팀에 제시했고 협상팀이 이를 초과하는 수가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이상 재정운영위 소위원회도 수가협상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재정운영위 소위원회에는 참여연대와 경실련을 대표해 각각 서울대 이진석 교수와 김진현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단체가 이번 수가협상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 협상을 과도한 수가인상으로 규정한 시민·사회단체 연합체인 건강연대에는 경실련과 참여연대도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이들 단체가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을 경우 이율배반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단 관계자는 "재정운영위 소위원회가 정한 가이드라인을 초과하지 않는 이상 일방적으로 공단에만 이번 협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며 "재정운영위 소위의 결정에 대해서는 공단 내부에서도 의아하다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고 털어놨다.
달라진 수가협상…의약단체 "공단이 성의를 보였다"
▲ 공단측 협상 테이블에 의약단체의 협상일정, 수가협상 자료 등이 놓여있다
가입자 단체들이 공단의 수가협상 기조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과 달리 의약단체들은 협상 과정에서 일제히 "공단이 성의를 보였다"는 언급을 하는 등 협상이 과거와는 양상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의약단체들이 공식적으로는 사회적 합의 도출이라는 큰 틀에서 수가계약을 수용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내심 공단이 제시한 인상폭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비록 재정운영위 소위원회가 지난해 수준을 넘어서는 수가인상 가이드라인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공단 협상팀이 보여준 전략은 가입자의 대리인임을 자인해 왔던 공단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의약계 전체의 평균 수가인상률이 2.4%로 결정될 경우 가입자들의 보험료 인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단이 이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2.4% 인상을 최대한 활용해 손쉬운 협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재정 흑자나 급여비 증가율 감소라는 수가인상 요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입자 단체의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공단이 수가협상 과정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별다른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 가입자 단체 관계자는 "결과론적이지만 과연 지금의 인상폭 보다 낮은 수준에서 계약이 불가능했느냐는 고민해 볼 문제"라며 "건보재정 지출을 최대한 줄이려는 과거의 모습과 이번 수가협상의 공단의 태도는 너무나 다르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과거 공단은 재정운영위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수가협상을 진행했다"며 "공급자 단체와 가입자 단체를 적당히 아우르려는 태도가 과연 가입자의 대리인을 자부하는 공단의 바람직한 모습인지는 되짚어 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의협만 수가계약 실패…"버림 받았나, 버렸나"
▲ 의협 협상팀이 어두운 표정으로 공단을 나서고 있다
이처럼 공단과 의약단체가 체결한 수가계약에 대한 논란이 확산 일로를 걷고 있지만 여기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단체는 바로 계약에 실패한 의협이다.
의협은 올해 수가협상에서 공단이 최종안으로 제시한 2.5% 수가인상을 거부하고 지난해에 이어 또 다시 수가인상률이 건정심에서 결정될 운명에 놓였다.
그러나 공단이 의협에 제시한 최종 수가인상률 2.5%가 지난해와 동일한 수치라는 점에서 의료계 내에서는 이번 수가협상에서 의협이 버림을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공단과 계약을 체결한 다른 의약단체가 지난해에 비해 0.5% 이상의 수가인상률을 가져간 상황에서 지난해와 동일한 수가인상률로 의협과 계약을 체결코자 한 공단의 전략 자체가 무리한 요구였다는 것이다.
회원들의 관심이 수가협상에 집중된 상황에서 지난해 건정심에서 결정된 수가인상률 2.3%에 비해서는 소폭 증가한 것이지만 다른 단체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의 인상폭에 의협 집행부가 동의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 의료계 인사는 "공단이 실제로 2.5% 수가인상에 의협이 동의를 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조차 의문"이라며 "이 상황에서 의협의 결단을 요구한 것은 지나치게 의협 집행부를 압박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를 놓고 일부에서는 공단이 2.4% 수가인상이라는 충분한 가이드라인을 확보하고도 각 의약단체별 인상폭 배분 등 협상 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서 의협과의 계약에 실패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수가계약 체결에 조급한 나머지 공단이 일부 의약단체에 지나치게 높은 수가인상률을 책정하면서 의협이 상대적으로 수가인상률 산정에서 홀대를 받았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올해 상황을 본다면 의협의 2.5% 수가인상은 그리 낮은 수준은 아니다"면서도 "약사회나 병협 등에 과도한 수가인상을 안겨주면서 협상이 제대로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느껴진다"고 분석했다.